- 1물가 바구니의 천지개벽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 물가 바구니는 455개 품목으로 늘어났고 조사 풍경 또한 천지개벽했다.
- 2입퇴장 리스트는 현대 풍속사 물가 바구니 속 품목들의 입퇴장 역사는 그 자체로 정직한 한국 현대 풍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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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일시 : 2026.08.07
게티이미지 광복 3년 차였던 1947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물가 조사를 했다. 당시 조사원들은 수십 개 품목의 가격을 들여다보다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 가계 지출의 절반가량을 단 세 가지 품목이 독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쌀과 장작, 그리고 뜻밖에도 고춧가루였다. 이 세 품목의 지출 비중은 무려 46.3%에 달했다. 당장 오늘 한 끼 밥을 먹고, 방에 불을 때 추위를 피하는 것이 생존의 한계선이었던 시절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가난한 시절에 주식인 쌀과 땔감인 장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념인 고춧가루가 왜 가계부의 거대한 축을 차지했을까. 답은 척박한 식탁 풍경에 있었다. 광복 직후 서민들의 식탁에는 고기나 생선은커녕 마땅한 채소반찬조차 올리기 어려웠다. 값싸고 구하기 쉬운 시래기나 배추, 무 따위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팍팍 쳐서 맵고 짜게 버무린 김치나 장아찌가 반찬의 전부였다. 다른 부재료가 없으니 오직 고춧가루의 강렬한 매운맛에 의존해 맨밥을 겨우 넘겨야 했던 것이다. 맹물에 매운 김치 한 조각을 얹어 허기와 추위를 달래며 체온을 올리려 했던, 눈물겨운 ‘생존형 매운맛’이 만든 통계였다. 이후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경제 성장 궤도에 오르고 전국 단위의 현대적 ‘소비자물가지수’가 공식 출범한 것은 1965년이다. 이때는 조사원들이 직접 전국의 가정을 방문했다. 시장통을 누비며 쌀 한 바가지, 난방용 석유 한 통, 목욕탕 입장료 등 111개 대표 품목의 가격을 손글씨로 장부에 적어 내려갔다. 물가 바구니의 천지개벽 그로부터 60년이 흐른 지금, 물가 바구니는 455개 품목으로 늘어났고 조사 풍경 또한 천지개벽했다. 태블릿PC를 통한 현장 입력은 물론, 온라인 쇼핑과 디지털 서비스 가격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웹 스크래핑을 해 실시간으로 수집한다. 국가데이터처(구 통계청)는 이 방대한 바구니를 세태 변화에 맞춰 5년마다 정기적으로 개편한다. 이번에 발표된 2025년 기준 개편안을 보면 대한민국이 도달한 디지털 문명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읽힌다.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구독료, 클라우드 저장공간 이용료, 온라인쇼핑 구독료가 새 식구로 진입했다. 스마트워치와 전기차 충전료, 조립식 수납가구와 영유아 강습료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식품·외식 분야에서는 요즘 젊은 세대의 소울푸드로 정착한 마라탕과 식사 대용 샐러드, 그리고 간편식의 끝판왕인 밀키트가 당당히 문턱을 넘었다. 반면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대거 짐을 싼 탈락자의 명단에 이르면 추억이 머문다. 무엇보다 반세기 가까이 물가 바구니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지켜온 고사리와 도라지가 제외됐다. 가구당 월평균 지출액이 조사 포함 기준선인 대략 300원대 이하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나물을 직접 사 와서 다듬고 삶고 무쳐 먹는 가정을 요즘은 찾기 힘들다. 더구나 이들은 명절 차례상과 집안 제사상의 대명사였다. 유교 문화의 총본산인 성균관마저 “명절 상차림에 나물 3종을 고집하지 말라”고 공식 권고하는 세상이다. 제사 자체가 사라지는 세태 속에서 고사리와 도라지의 퇴장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다. 이들과 함께 땅콩, 부탄가스, 습기제거제, 싱크대, 회화용구, 블랙박스, 그리고 외장하드 같은 저장장치가 탈락했다. 외식 메뉴 중에서는 도시락이 빠졌고 무상교육 및 보육정책의 확대로 개인이 직접 돈을 낼 일이 없어진 유치원 납입금, 학교 보충교육비, 보육시설 이용료도 바구니 밖으로 밀려났다. 입퇴장 리스트는 현대 풍속사 물가 바구니 속 품목들의 입퇴장 역사는 그 자체로 정직한 한국 현대 풍속사다. 5년 전인 2020년 개편 때는 직장인 아버지를 상징하던 넥타이가 빠졌다. 자율복장제 확대 속에 넥타이 공장들이 문을 닫던 시기다. 같은 해에 프린터와 사진기도 제외됐다. 디지털 문서가 종이를 대체했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모든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30년 넘게 학생들의 책상을 지키던 종이 사전은 이미 2011년 개편 때 자리를 잃었다. 스마트폰 검색 시대가 도래하자 서재를 지키던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의 시대도 끝이 났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1965년 원년부터 단 한 번도 방을 빼지 않고 자리를 지킨 원년 멤버들이 존재한다. 쌀, 쇠고기, 돼지고기와 소금, 간장, 된장 같은 것들이다. 세상의 기술이 아무리 화려하게 명멸해도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삼시 세끼의 근본이자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혼의 식재료’들이다. 서민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주던 라면, 소주, 맥주, 담배 역시 60년 세월 동안 꿋꿋하게 물가지수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한 가계의 장부에 쌀과 장작, 고춧가루 값을 적어 넣던 1947년의 풍경에서, 매달 AI 구독료를 자동이체하고 마라탕 밀키트를 주문하는 오늘날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도라지와 고사리의 퇴장은 씁쓸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오늘 우리가 매달 귀하게 지불하는 AI 구독료 역시 먼 훗날 더 놀라운 신문물이 등장하면 물가지수라는 타임캡슐 속 빛바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통과해온 시대의 온도와 가야 할 길을 가장 정직하게 비춰주는 시대의 거울일 것이다. 어수웅조선일보에서 문학, 영화, books 등 문화부 기자를 오래했다. 지은 책으로 ‘탐독’ ‘파워 클래식’ 등이 있다. 주말뉴스부장, 문화부장, 여론독자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 정책주간지 K-공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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